두고 온 여름, 성해나_260912
인스타그램에 ‘오늘의 죽음’이라는 주제로 사진을 한동안 올린 적이 있었다.
데미안 허스트의 작품들처럼 뭐 뜻이 있고 철학이 있고 이런 것은 아니었지만 세상에 켜켜이 얽혀있는 수많은 주제들 중에서 그 프레임이 눈에 잘 와닿았다.
왜였을까,
나 역시 마음 속 구멍이 있고, 그 구멍의 난해함이 불편해서 형상화할 무언가를 찾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. 때론 찔리고 베인 고통보다 단지 비어있는 곳의 고통이 더 괴롭기도 하니까.
뭐, 어떤 이유였던 간에 요즘은 죽음을 그렇게 좇지는 않는다. 대신 요즘은 ‘흔적’이 눈에 꽤 들어온다.(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한 번 더 써 봐야겠다)

어찌보면 사람들은 자기 사진 속에 담을 수 있는 게 그리 넓고 많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.
열여덟 살 때 적은 글에서 그리던 서른 여덟의 나는 우주를 유영할 것 같지만, 그 자리에서 몇 발자국도 더 걸어 나오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.
비슷한 이유로 사람이 사랑을 담아내는 것도 너무도 어렵다. 특히 마음이 말랑하던 유년기에 사랑을 주고 받는 길이 잘 닦여 있지 않으면 이후에 그 길을 내는 것은 시간이 흐를 수록 더 어려워진다.
이 소설과 같은 이야기를 페이지 바깥에서 읽고 있으면 등장인물들의 모든 서사, 맥락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움이 크게 느껴진다.
어릴 때는 페이지 안의 서사 뿐 아니라 사람 안의 서사도 잘 읽지 못했다. 그래서 밀려오는 안타까움에 오지랖도 많이 부렸었다. 내가 원하는 이야기로 내 주변 역시 풀어나가고 싶었기 때문이다.
지금은 세 가지 정도의 이유에서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.
우선 내가 그 정도의 여유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. 그리고 타인의 서사 안에선 특정 방향으로 행동하게 될 확률이 아주 높을 수 있다는 것도 좀 더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. 또한 맥락에 맞지 않는 오지랖은 폭력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.
결국 사람 관계에서의 해석은 텍스트를 읽을 때에도 비슷하게 적용되어 재하/기하의 여정과 선택 역시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하게 되어간다. 그들의 삶의 형태가 나와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며, 마냥 비극도 아니고, 앞으로도 여러 변화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.
우리들도 역시 각자의 여름을 어딘가에 두고 오기도 했고, 어떤 계기가 되면 다시 찾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.